동화 속 자연은 수동적이지 않다. 눈 깜짝할 새에 하늘을 뚫고 자란 ‘콩나무’처럼 하지훈이 펼친 풍경은 인간의 눈으로 재단한 에덴의 동산과 같은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멀다. 회화 속 자연은 짐짓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어딘가를 재현한 듯 하지만 실상은 개인적 기억 속에 저장된 자연의 파편을 화면 안으로 이식한 가상의 자연이다. 잠들어 있던 파편이 밖으로 나오자 수동적이었던 기억은 스스로 진화하면서 기이한 풍경으로 자라난다. 이는 동양의 산수처럼 관념적이지도 서양의 풍경화처럼 웅장한 비장미를 선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미아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묵시록적 세계에 보다 가까워 보인다.

하지훈은 어린 시절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여러 부대로 이사하며 성장했다. 이후 독일 유학까지 우연의 일치이지만 비교적 자연과 가까운 생활을 했다. 생활 이외에도 자연으로부터의 영향은 잡지, 신문, 영화 및 다양한 매체를 통해 기억 속에 저장된다. 회화 속에 등장하는 풍경은 기억의 편린이 조합된 ‘콜라주 된 풍경’이라 부를 수 있겠다. 대개의 풍경이 그로테스크하거나 괴기스런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이는 의도적으로 이 풍경이 실경이 아닌 상상의 파생물이란 단서를 주기 위해서이다. 하지훈은 리얼리즘 계열의 재현된 풍경화, 그리고 그 안에 부여된 상징과 의미를 거부한다. 이런 접근은 이른바 아나크로니즘(anachronism, 시대착오적인 사람, 연대기 오류)으로 불리는 1990년대 회화의 종말이란 선언 이후 나타난 역설적 움직임으로 ‘지금과 여기’라는 근대적 사상으로부터 벗어난 과거-현재-미래의 연대기적 질서가 무너지고 되레 과거로 회귀하려는 문화현상과 닮아있다. 이 같은 움직임을 이끈 대표적인 현대미술가는 피터 도이그, 필립 거스통 등을 들 수 있다. 하지훈 역시 위의 작가들로부터의 영향을 숨기지 않는다. 또한 국적, 인종, 성의 차이와 무관하게 대표적인 동시대 작가들의 영향을 받는 것은 전 지구화에 의한 보편적 문화 현상이다. 그가 제시한 가상의 풍경에서 독일과 최근 유행하는 화풍이 떠올려지는 건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시대착오적 낭만주의 화풍의 이미지는 시간을 거슬러 19세기 스위스의 상징주의 화가 아놀드 뵈글린(Arnold Böcklin)의 심리적 뉘앙스를 풍기는 풍경의 형태로도 나타나는 듯하다. 나는 작가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보았다. “왜 주변의 풍경은 보이지 않나요?”라고. 그는 현재의 상태도 나중에 작업으로 나타날 것이라 답했다. 시대착오적인 현상은 단순히 쓰여진 역사 속에서만 진행되지 않고 개인의 삶 속에서도 발현되는 것이란 사실을 그는 내게 알려 주었다.

그럼에도 약간의 차이는 존재한다. 서구 예술가들의 조형적 실험과 신선한 스타일이 등장하는 데에는 축적된 미술사 연구와 그 계보 안에서 그들의 시도가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들의 작업은 나름의 논리와 담론화에 의해 설득력을 보장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비서구권 작가들이 서구의 경향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작업으로 발전시키는 데에는 틀림없이 더 많은 고민과 이 고민을 뒷받침할 이론적 배후가 필요하다. 하지훈은 이 같은 한계를 잘 알고 있는 작가처럼 보였다. 한국의 현대미술에서 풍경은 특히 리얼리티라는 사상적 관성 속에 얽매여 있었다. 초기 민중미술도 그러하였고 진경산수와 같은 한국화의 개념 또한 실재와 재현의 관계를 사회주의적 사상에 연결 짓는 경우가 잦은 게 사실이었다. 최근 젊은 작가들은 가상과 실재 사이의 양극에서 방황 중이다. 한국성에 대한 지나친 집착만큼 이를 거부하는 세계적 보편성의 미술을 좇는 부류도 많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일 것이다.

하지훈은 작업 노트에서 자신의 기억을 반영하는 이미지로 조합된 풍경은 실제 자연보다 더 명확하게 자연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실제로 자연은 풍경이 아니다. 풍경은 자연을 바라보는 주관적 시점을 드러낼 때 비로소 나타난다. 즉 풍경은 해석된 자연임을 지시한다. 그리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정원이나 공원은 해석된 자연을 인공적으로 배치한 이상향의 표본과 같다. 정원의 스타일이나 질서가 시대적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다면 하지훈의 풍경화 이면에는 어떠한 세계가 숨어 있을까? 작가는 자신의 풍경은 다른 공기와의 충돌에 의해 생성된 기이한 생명체라고 설정한다. “요새” 연작이나 “개체적 풍경” 연작 모두 동화적 세계를 반영하는 일종의 연극적 상태, 비현실적 실재를 재연하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하지훈이 고민해야 할 것은 그의 몽환적인 풍경이 기억의 집합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자연과 문명, 인공과 자연, 실재와 가상 등 세계를 구성하는 바탕으로 확대되기를 바란다.

정현